시장화와 산업혁명

시장경제의 발전과 산업혁명을 연결 짓는 견해는 축적론만큼이나 뿌리가 깊고 두 견해는 서로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장원제(농노제)길드로 대표되는 발전 없는 자급자족적 중세경제가 시장이 발달하고 국제무역이 확대되면서 근대 사회로 이행했다는 것이다.

🧙 중세 경제의 문제

  • 장원제는 농노들의 인센티브 문제와 공유지 문제를 야기했다.
  • 길드는 공급을 독점함으로서 자유로운 경제를 방해했고, 그 때문에 기술혁신이 저해되었다.

장원제와 길드라는 멍에를 쓴 채 잠들어 있던 중세 유럽 경제는 17-8세기 비상을 시작하는데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지적된다.

🚂 근대 경제 발전의 원인

  • 17-8세기 영국 농촌에서 시장화가 진행되면서 경제의 효율성이 증가하고 자본축적이 일어났다.
  • 15세기 이후 식민지와의 무역(착취)을 통해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시장화를 근접원인으로 본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한 근본원인에 대해서는 재산권 등 시장 제도의 발달, 분권적인 유럽 문화의 특수성, 신대륙을 발견하기 쉬운 지리적 요인(대서양 해류) 등 다양한 논의들이 있는데 뒤에서 경제발전의 여러 요인들에 대해 검토하면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근접원인인 시장화에 대해서만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유럽예외주의

고대나 중세부터 존재했던 유럽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의견을 유럽 예외주의(European Exceptionalism)라고 부른다. 유럽에서 싹튼 근대적 합리주의를 강조하는 막스 베버, 유럽에만 역사적 발전과정이 있었다고 본 마르크스도 유럽 예외주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시장화, 시장제도, 분권적 특성으로 산업혁명을 설명하는 것도 넓게 보면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왜 유럽이 특별했느냐를 다시 설명할 수 밖에 없는데 인종주의나 노골적인 우월론은 아니지만 설명의 구조 속에 유럽만 독특하거나 우월했다는 느낌이 스며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부드러운 본질주의(Soft Essentialism)라고도 한다.

마르크스와 그 영향을 받은 조류의 경우 유럽의 특수한 경험보편적 역사로 포장했다는 점에서 좀 더 노골적이다.

중세 암흑기

과거 학자들은 중세를 기술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정체되어 있었다는 의미에서 중세 암흑기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여전히 대중에게 널리 퍼져있으나 오늘날 학자들은 더 이상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살펴볼 내용은 중세가 기술적, 경제적으로 유난히 정체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시장은 근대의 산물이 아니다.

시장경제가 산업혁명의 원동력이라면 18세기 말보다는 훨씬 이전이었어야 한다. 서유럽에서 시장화는 오랜 기간 서서히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 서유럽에서 장원제는 이미 11세기부터 수 세기에 걸쳐 화폐지대로 전환되었고 15세기에는 이미 이름 뿐인 몇몇 제약을 제외하자면 거의 사라졌다. 공유지의 비극은 경제학자들의 상상 속에만 존재할 뿐 중세 장원에서도 공유지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 12-13세기 이후에는 이탈리아 해양 도시국가 (베네치아, 제노바), 플랑드르(브뤼헤, 겐트, 앤트워프), 카탈루냐(바르셀로나), 북유럽의 한자동맹(뤼벡, 함부르크, 쾰른), 런던, 알프스 대통상로 도시들(밀라노, 제네바, 바젤) 등 상업 도시가 크게 번성하였다.
  • 이미 중세 말에 무역은 사치품 수준을 넘어 곡물, 양모, 모직물, 소금, 생선, 포도주 등 일상 용품이 활발히 거래되었는데 경제사에서는 이를 상업혁명이라고 부른다.
  • 15세기에는 무역회사금융회사들이 유럽 전역에 지점을 가지고 무역을 담당하였다.
  • 중국, 인도, 아랍권 등 유럽 외에도 시장경제가 번성한 지역은 많았고 고대 그리스, 로마에도 시장경제는 존재하였다. 특히 중국의 시장경제 규모는 유럽과는 비교도 안되는 정도였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룬다.

중세 유럽의 교역로


베네치아, 제노바는 동방과 런던, 플랑드르를 연결하는 대규모 네트워크를 지니고 있었다. 북해에서는 한자 도시들이 교역하고 있었고 내륙에도 많은 교역로가 존재했다.

한자의 여왕 뤼벡


독일의 한자도시 뤼벡(Hasestadt Lubeck)은 한자의 여왕이라고 불렸다. 한자동맹이란 12세기 북유럽 통상도시들의 상업 동맹이다. 15세기 최전성기에는 200개의 도시가 가입하였고 벨기에, 네덜란드, 스웨덴, 폴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러시아까지 북해와 발틱해 연안에 걸쳐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제국 자유도시였던 뤼벡은 지금은 함부르크 근교의 작은 도시지만 중세 후기에는 한자 동맹의 맹주로서 번성하였다. 강가에 보이는 건물들은 바로크 양식으로 17-8세기에 건설한 것인데 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된 것을 전후 재건한 것이다. 하지만 뒤로 첨탑이 보이는 성 마리아 대성당 은 13세기에 지어진 것으로서 당시 상업 도시 뤼벡의 위용을 드러내준다. 한자 동맹은 대항해시대 이후 쇠퇴하지만 이른바 “벽돌 고딕”이라는 북유럽 특유의 양식을 유산으로 남겼다.

벨기에 브뤼헤의 광장


브뤼헤는 중세 후기 유럽에서 가장 번성한 상업 도시 중 하나였다. 이후 플랑드르¹의 중심지가 안트베르펜이나 브뤼셀로 옮겨가면서 지금은 소도시가 되었지만 그 덕분에 구시가지가 보존되어 지금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에 하나가 되었다. 마르크트 광장은 시청과 길드홀²들이 모여 있는 브뤼헤의 중앙광장이었는데 지금은 관광의 중심지가 되었다.

¹ 벨기에는 네덜란드어권과 프랑스어권으로 나뉘는데 벨기에의 네덜란드어권 중 상당부분이 플랑드르 지방에 속한다. 주요 도시로는 브뤼헤, 겐트, 릴 등이 있다.
² 플랑드르나 홀란드(오늘 날 암스테르담이 있는 네덜란드의 지역) 지방의 길드들은 길드의 회합 장소를 가지고 있었는데 네덜란드어로 Gildenhuis라고 한다. 여기서는 Gildenhuis를 길드 홀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잉글랜드에서 길드 홀(Guild Hall)은 시청이나 길드들의 회합 장소를 의미했다.

산업혁명 이전에 번성한 시장경제

14세기 베네치아에서는 무역회사, 금융회사 등 근대적 시장경제의 특징들이 나타났다. 자본가들이 상인에게 자금을 대여하는 일종의 합명회사(코멘다)도 생겼다. 베네치아는 상인들이 지배하는 국가였고 때로는 교황의 금지를 무시하면서 이교도들과 교역했다.

16-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상업이 크게 발달하면서 황금기(Dutch Golden Age)를 맞이했다. 네덜란드의 사회계층은 재산과 소득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많은 상인들이 귀족 작위를 돈으로 사기도 하였다.

산업혁명 이전에 번성한 시장경제


중세 후기까지 이탈리아가 가장 번성한 곳이었고 잉글랜드는 19세기가 되어서야 따라잡을 수 있었다. 홀랜드는 황금기부터 두각을 나타내서 19세기 초반까지도 잉글랜드보다 소득이 높았다.

15세기 베네치아 지도


중세 후기 베네치아는 유럽에서 가장 번성한 상업 도시였다. 정치적으로도 왕국이나 제국에 소속되지 않은 상인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도시 국가였다. 크게보기

런던의 롬바르드 거리


런던의 금융중심지인 롬바르드 거리는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지역에서 온 이름이다. 롬바르디아는 밀라노가 속해 있는 이탈리아의 경제 중심지인데 중세 이탈리아 도시 국가 은행들의 런던 지부가 모여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

램브란트,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과 빌럼 반 루이텐뷔르흐 중위의 출정(1642)


De compagnie van kapitein Frans Banning Cocq en luitenant Willem van Ruytenburch

야경(Night Watch)로 알려진 이 작품은 17세기 네덜란드는 이른바 “황금기”를 상징한다. 사실 이 작품의 배경은 밤이 아니라 낮이며 이들은 암스테르담의 부유한 상공업자, 변호사, 시의회 의원 등이 조직한 민병대이다. 네덜란드 도시에서는 유력자들이 민병대를 조직하여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으며 이후에도 자경 활동을 벌였다. 유럽에서는 도시의 부유한 상공업자, 전문직 종사자들이 시의회를 장악하고 세습화되었는데 이들을 도시귀족(patriciate)이라고 부른다. 이 작품은 민병대의 의뢰로 그린 것인데 지나치게 파격적이어서 이후 부유층의 의뢰가 급감하여 렘브란트의 몰락을 촉진하는 작품이 되었다.

길드와 혁신, 그리고 중세경제

론도 캐머런, "간결한 세계 경제사" 중에서

기존의 교과서들은 중세인들을 전통에 얽매이거나 변함없는 일상생활에 집착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중세인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직접적이고도 실용적인 목적을 위하여 새로운 것을 추구하였다. 우리가 안경이나 기계식 시계와 같은 유용한 발명품을 이용할 수 있게된 것은 고상한 철학자 덕분이 아니라 중세의 수리공들 덕분이었다.

전통적으로 길드는 독점으로 인한 비효율성의 대명사였다. 미시경제학 시간에 배웠듯이 독점 시장에서는 높은 가격, 낮은 생산량으로 인해 자중손실이 발생한다. 또한 장인 길드들은 제품의 종류, 규격, 제조방법 등에 대한 세세한 규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것이다. 경쟁제한과 세세한 규정은 혁신을 가로막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 연구들은 길드의 품질 유지 시스템, 교육 시스템, 사회복지 시스템, 노동 계약의 이행을 강제하는 제 3자로서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길드의 역할에 대한 논의를 참고하자.

실제 통념과 달리 중세 후기부터 근세까지 서유럽에서는 많은 혁신이 일어났다. 수차, 시계, 유리, 인쇄술 등에서는 가장 중요한 혁신들이 서유럽에 집중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중세의 기술혁신을 참고하자.

또한 길드는 도시의 자율성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정치 시스템이기도 했다. 베네치아와 스위스 도시들은 길드가 지배하는 도시였고 네덜란드 독립 역시 길드의 군사력을 통해 이루어졌다. 길드 없이는 도시를 중심으로 한 중세 후기의 상공업 진흥은 일어나지 못했을지 모른다.

종종 길드는 혁신에 저항했으나 대부분은 성공적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개발했을 때 필사가 길드가 이에 저항했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설사 그랬더라도 인쇄술이 수십년 만에 전 유럽으로 퍼진 것을 보면 길드는 혁신을 막는데에는 그다지 유능하지 못했음이 틀림 없다.

길드에 대한 균형있는 평가

길드에 대한 과거의 견해는 허구에 기반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 동향은 지나치게 길드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길드는 당대의 경제를 떠받치는 중요한 제도였고 기존에 생각했던만큼 혁신을 가로 막지도 않았고, 오히려 중요한 혁신을 이룩하기도 했다는 정도가 정당한 평가일 것이다.

결국 산업혁명은 길드 밖에서 일어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산업혁명이 길드가 이룩한 조건 위에서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

모든 중요한 발전은 기존의 성과 위에서 그것을 파괴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산업혁명의 원동력은 고도로 발달한 시장경제 제도가 아니다.

18세기 초 남해회사 포말사건(1)때 영국은 포말법이라고 불리는 주식회사에 대한 견제 장치를 마련했으며 1825년에야 폐지되었다. 영국은 주식회사 형태의 기업조직에 대한 법적 장애가 있는 상태에서 산업혁명에 돌입하였다.

아담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 철학은 사후에야 정책적 차원에서 논의되었으며 자유방임주의의 결정적 승리로 회자되는 곡물법 철폐는 1845년에 일어났다.

아담 스미스로 대표되는 현대적 시장경제 제도의 성립을 산업혁명의 원동력으로 보는 시각은, 산업혁명 시기를 18세기 후반이라고 본다면 시기적으로 일관성 없는 설명이다.